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가수 김재규 묘지 자녀 나이 사망일

카테고리 없음 2023. 10. 26. 22:37

궁정동에서 울린 총성... 10.26을 아시나요
-2023. 10. 25

44년 전 10월 26일은 10.26이라 불리는 故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이 발생한 날이랍니다.

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던 중앙정보부의 안가에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 행사를 마친 박 전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미리 준비한 권총으로 자신의 숙적인 차지철 경호실장을 쏜 후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권총을 발사했습니다.

이후에도 김 부장은 차 실장과 박 대통령에게 다시 총격을 가했다. 박 대통령은 바로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송 중 사망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이 과정에서 김 부장과 공모한 중앙정보부 박선호 과장과 박흥주 수행비서 그리고 안가경비원들에 의해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경호실 차량운행계장 등도 살해됐답니다.


김재규는 바로 육군본부로 가서 군을 장악하려 했지만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의 체포명령에 의해 체포됐고 대한민국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후 10.26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맡은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이 힘을 이용해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 소장과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내의 사조직인 ‘하나회’ 세력들을 일컫는 신군부가 권력을 잡는 이 사건을 12.12 군사반란이라 부른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바꾼 이 시기의 사진들과 당시 서울신문 지면들을 서울신문 사진창고에서 찾아봤다. 이 사진과 지면들로 엄혹했던 그 시절을 돌아본답니다.

44년 전 궁정동에 울린 총소리...범인은 '최측근' 그 사람
- 2023. 10. 26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인근에서 총성이 울렸다. 44년 전 오늘,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격으로 서거했다. 향년 만 62세.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인물이기에 그가 시해의 주범이라는 소식은 전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며 담담하게 사형을 받아들였답니다.

그가 박 전 대통령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재규는 자유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시해 이유라고 주장했으나, 충동적인 범행이라는 설, 미국의 개입설 등 여러 추측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였기에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주국방 정책을 두고 갈등을 빚었답니다.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밝힌 아시아에 대한 외교 정책인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닉슨 독트린에는 미국이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며 아시아 제국과의 조약상 약속은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해 그에 대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박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군은 북한의 남침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당시 한국은 북한의 침공을 막아낼 독자적인 전력이 없는 상태였고, 결국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북한에 파견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비밀리에 합의시켰다.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이 처음 시도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닉슨 독트린에 저항하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실제로 10.26 사건 재판 뒤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실현에 대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파벌 싸움 역시 김재규가 박 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게 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김재규는 장교들로부터 "자존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그런 김재규는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 견원지간이었는데, 시해가 발생한 10월 26일 오전에도 차지철과 김재규는 갈등을 빚었답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충남 당진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 중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김재규가 있던 중정이 관리하던 보안시설이었다.

김재규로서는 준공식에 참석할 명분이 있던 것인데,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정보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어쩌란 말입니까? 김 부장은 참석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세요"라며 김재규에게 면박을 줬답니다.

여러 갈등이 겹치면서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0월 26일 저녁,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하면서 마지막 연회가 시작됐다.

김재규는 연회 도중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7시 41분, 자리에 돌아온 김재규는 "건방져"라는 고함과 함께 발터 PPK를 꺼내 두 발을 쐈다.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두 번째는 박 전 대통령의 가슴에 맞았습니다.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를 확인 사살하려고 했으나 권총의 기능 고장으로 발포가 되지 않자 박선호로부터 S&W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와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해 치명상을 입혔다.

이어 그는 박정희의 우측 관자놀이를 노렸고, 탄은 박정희의 오른쪽 귀 바로 윗부분을 뚫고 들어가 지주막을 뚫고 뇌를 관통한 뒤 왼쪽 광대뼈에서 멈췄다. 18년간 이어지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0·26 사건 발생 18일 만인 1979년 11월 13일, 김재규를 비롯해 8명이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 미수 혐의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됐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우발적 범죄가 아닌 사전에 공모한 계획적 범죄로 판단했답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김재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인 상황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라고 전했답니다.

김재규는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처형 며칠 전 교도관에게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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